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7년 한국시리즈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||<-2><:> {{{+2 {{{#edd36c '''1997'''}}} {{{#edd36c '''프로야구'''}}} {{{#ffffff '''한국시리즈'''}}}}}} || ||<#c30452> [[파일:LG 트윈스 심볼(1990~2005).png|width=130]] ||<#f01e23> [[파일:해태 타이거즈 심볼(1996~2001).png|width=150]] || ||<#c30452> [[LG 트윈스|{{{#ffffff {{{+1 '''LG 트윈스'''}}}}}}]] ||<#f01e23> [[해태 타이거즈|{{{#000000 {{{+1 '''해태 타이거즈'''}}}}}}]] || [[1997년]] 열린 [[KBO 한국시리즈]]. [[해태 타이거즈]]와 [[LG 트윈스]]간에 펼쳐졌다. 당시 두 팀의 대결은 한국시리즈 8회 진출 8회 우승의 해태와, 구단 이름을 바꾼 후 한국시리즈 패배가 없는 LG[* LG는 이전에 진출한 2차례(1990년, 1994년) 한국시리즈를 모두 4연승으로 우승했다.][* 청룡 시절까지 포함하면, 1무 4패가 있다. 그 1무 4패를 안긴 팀이 바로 해태다.]의 맞대결로 화제를 모았다. [[LG 트윈스]]의 전신 [[MBC 청룡]] 시절까지 포함하면 [[1983년 한국시리즈|1983년 이후]] 14년만에 맞이한 리턴 매치였다. 결과는 [[해태 타이거즈]]의 통산 9번째 우승. 한국시리즈 MVP는 93년에 이어 [[이종범]]이 차지했다. [[해태 타이거즈]]는 이해 페넌트레이스에서 2~5위인 [[LG 트윈스|LG]], [[쌍방울 레이더스|쌍방울]], [[삼성 라이온즈|삼성]], [[OB 베어스|OB]]를 상대로 37승 1무 34패를 기록할 정도로 평타 수준이었지만, [[현대 유니콘스|현대]], [[한화 이글스|한화]], [[롯데 자이언츠|롯데]]를 상대로 38승 16패를 기록하면서 1위를 차지했다. '''특히 롯데는 해태에게서 3승 15패를 기록, 해태의 패넌트레이스 우승을 도와주는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.''' 반면 [[LG 트윈스|LG]]는 [[해태 타이거즈|해태]]에 10승 8패로 우위를 보이고도 [[쌍방울 레이더스|쌍방울]]에 6승 12패[* 1995 시즌에도 정규시즌 3위였던 롯데전 6승 12패(후반기 1승8패) 때문에 OB에 11승1무6패로 앞서고도 0.5경기차 2위에 머물렀고, 결국 준PO를 생략한 롯데에 플레이오프에서 2승4패로 탈락했다.], [[삼성 라이온즈|삼성]]에 8승 10패를 기록하면서 발목이 잡혔다. LG 역시 하위권 4팀을 상대로 모두 우세했다. '''특히 현대를 상대로는 해태가 롯데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15승 3패로 철저하게 짓밟았다.'''[* 현대의 LG전 약세는 왕조 시절에도 계속되었다. 현대가 삼청태현 시절을 빼면 유일하게 상대 전적에서 뒤진 것이 LG이니 말 다한 셈.] 그러나 롯데를 상대로는 처음에 7승1무로 앞서다가 7월에만 7연패를 기록한 탓에 남은 3경기를 모두 이기고 나서야 간신히 10승1무7패로 앞설 수 있었다. 이것이 상당히 뼈아팠던게 이 해는 1~4위가 6게임 차이일 정도로 '''[[용호상박]]'''으로 치고 받았던 시즌이었기 때문이다. 즉 7월의 롯데전 7연패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1위도 노릴만 했던 것. [[쌍방울 레이더스|쌍방울]] 역시 [[해태 타이거즈|해태]]와 8승 10패, [[LG 트윈스|LG]]에는 12승 6패를 기록했지만 [[삼성 라이온즈|삼성]]에게 5승 1무 11패를 기록했다. [[삼성 라이온즈|삼성]]은 [[해태 타이거즈|해태]]에게 7승 1무 10패, [[LG 트윈스|LG]]에 10승 8패, [[쌍방울 레이더스|쌍방울]]에 11승 1무 5패를 기록했지만 이 팀은 엉뚱하게도 이 해 6위였던 [[현대 유니콘스]]에게 7승 1무 10패로 발목이 잡혔다.[* 삼성은 재미있게도 현대가 존속했던 1996~2007시즌 중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해 본 것이 달랑 '3시즌'이 끝이었다.] 특히 1997 시즌에 해태는 LG와의 맞대결에서 광주 홈에서 5승 4패, 잠실 원정에서 3승 6패를 기록했는데, 잠실에서 당한 6패 중 5패가 '''8회 이후 역전패'''였다. 그 중에는 4월 15~16일 2경기 연속 연장 끝내기패, 6월 29일 [[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]]이 있던 경기[* [[이종범]]의 연속 도루성공 기록이 29개에서 멈춘 경기이기도 했다.]에서 [[박재용]]이 당대 최고의 마무리 [[이상훈(좌완투수)|이상훈]]을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때려내고도 공수교대 후 9회말에서 재역전패를 당한 경기와 9월 10일 [[임창용]]이 9회말 투아웃에서 [[허문회]]에게 안타를 내준 이후 견제 악송구를 범하고 [[이병규(1974)|이병규]]에게 동점타를 허용한 이후에 맞이한 연장 14회말에서 [[조계현]]이 [[송구홍]]에게[* 송구홍은 1993년 4월 11일 광주경기에서도 '''9회초 투아웃에서''' 조계현의 [[노히트 노런]]을 깨는 안타를 친 바 있었다. 공교롭게도 1997 시즌 종료 후 송구홍이 해태로 트레이드되기 며칠 전 조계현이 삼성으로 이적하여 이 둘은 선수로서는 같은 팀에서 만나지 못하다가 2012 시즌에 LG에서 '''조계현은 1군 수석코치로, 송구홍은 1군 주루코치로''' 서로 만났다.] [[https://youtu.be/RYmqIy2cjj0|역전 끝내기 안타를 내준 경기]]가 포함되어 있다. 이 한국시리즈는 "이종범 1명 vs LG 트윈스 전원"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이종범이 홀로 공수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. 또한 [[이종범]]이 승부를 결정짓는 3개의 홈런을 작렬하고, [[홍현우]], [[김창희(야구)|김창희]], [[김종국(야구)|김종국]]이 4차전에서 나란히 홈런을 기록할 정도로 장타력을 과시했고, [[이대진]]이 2승, [[임창용]]이 3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해태는 그야말로 '''[[이원만(기자)|되는 집안]]'''이었었다.[* 이후 어이 없게도 모기업은 [[IMF 사태]]가 터져서 부도가 나고 말았다. 돈만 있었으면.] 반면 LG도 해태와 충분히 해볼만했는데, 이해 해태에게 패넌트레이스에서 10승8패로 우위를 보였고 1990, 1994시즌 페넌트레이스, 한국시리즈를 석권했고 그 멤버들이 대부분 팀을 이끄는 만큼 우승 DNA도 있었는데다, 해태와 페넌트레이스에서 1.5게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. 무엇보다 한국시리즈 전체 7경기 중 최대 5경기를 [[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|자신들의 안방]]에서 치르게 된데다 1, 2차전을 잠실에서 치르게 되었고, 상술한 대로 잠실 해태전에서 '''5번이나 8회 이후 역전승을 거두었기에''' 자신감도 충만해 있었다.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경기마다 잘 풀리지 않았고, 결국 [[해태 타이거즈]]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. [[김상진(1977)|김상진]]은 5차전에 선발로 나와 '''완투승'''을 기록했다.[* 아직도 깨지지 않는 '''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''' 기록이다.] 당시 규정에 의하여 1, 2차전은 [[무등 야구장]]이 아닌 '''[[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]]'''에서 치러졌다.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 연고팀일 경우 순위에 상관 없이 1, 2, 5, 6, 7차전을 잠실에서 열도록 했기 때문이다. 당시에는 5-7차전을 무조건 잠실구장에서 치르게 하는 중립구장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팀이라면 3차전부터 경기를 계속 잠실에서 치러야 했고, 그 때문에 지방 구단이 경기력에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이를 고친 것이다.[* 1, 2차전만 연고지에서 치르게 되어 있었던 [[1983년 한국시리즈|1983년]]을 생각해 보면, 1차전만 광주, 2, 3, 4, 5, --6 ,7--차전이 모두 잠실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.] 앞서 1995년 당시 잠실팀들을 상대로 [[LG 트윈스|플레이오프]] 및 [[OB 베어스|한국시리즈]]를 경험한 롯데 자이언츠는 이 규정을 불리하게 적용 받아 선수들의 체력 등 경기력에 영향을 받았다. 당시 [[김용희]] 전 감독은 KBO에게 규정의 불공평함을 토로했고 이후 바뀐 규정이 바로 '''위에 있는 규정'''이 되었다.[* 하지만 당시 저 두 팀은 이미 잠실 팀이었다. 저 해에는 신설된 규정에 따라 준플레이오프 없이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가 성사된 유일한 시리즈였다. 3위 롯데는 플레이오프 7경기 중 4경기가 잠실이었고, 한국시리즈 또한 7경기 중 역시 5경기를 잠실에서 치러 엄청난 고전을 했었다. 그냥 롯데가 운이 없었을 뿐...][* 그런데, 규정이 바뀐 지 2년 후에 KBO가 양대리그를 시행하면서 플레이오프-한국시리즈 규정 또한 크로스 토너먼트로 바뀌었고, 그 때 이 규정이 폐기되었다가 2001년 단일리그로 회귀하자 다시 부활하였는데, 그 과정에서 96년 이전 규정이 부활하는 바람에 플레이오프 진출 팀이 두산 베어스였던 [[2001년 한국시리즈]]는 3차전부터 계속 잠실구장에서만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.] 이로써 해태는 [[KBO 한국시리즈]] '''9번 진출에 9번 모두 우승'''이라는 진기록을 작성한다. [[해태 타이거즈]]를 기억하고 있는 올드 팬들에게는 이 해의 한국시리즈 우승이 엇갈린 기억으로 남아있다. 이 해의 우승으로 9전 9승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영광이지만, [[해태 타이거즈]]라는 이름으로 거둔 최후의 우승이었고[* 물론 [[2009년 한국시리즈|2009년과]] [[2017년 한국시리즈|2017년에도]] 타이거즈라는 이름을 달고 우승을 했지만 [[KIA 타이거즈|해태라는 팀명이 사라진 뒤의 우승이었다.]]] 우승을 결정지은 후 정확히 일주일 뒤인 1997년 11월 1일 [[1997년 외환 위기|IMF 사태]]로 모기업 [[해태제과]]가 부도를 맞아 팀의 전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면서 1998년부터는 중하위권으로 떨어졌다. 더구나 이 해 팀의 우승을 결정지은 마지막 투수는 [[김상진(1977)|팀의 새로운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]]였음에도 얼마 안되어 병마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. 이래저래 97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해태에게 '마지막 영광이자 긴 고난의 시작'이었던 것이다. [[김은식]] 작가의 '''[[해태 타이거즈]]와 [[김대중]]'''이라는 책을 보면, 해태의 '''[[리즈 시절]]'''에는 [[호남]] 출신인 김대중은 엄청난 탄압을 받는 야인이었고, 김대중이 [[제15대 대통령 선거]]에서 대통령에 당선 되자 해태가 본격적으로 몰락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나온다. 게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망한 [[2009년]] [[8월]]에는 KBO 역사에서 아직도 깨지지 못한 월간 최다승인 '''20승'''을 쓸어담아 KIA가 [[페넌트레이스]] 1위에 올랐고, 두 달 뒤 열린 [[2009년 한국시리즈]]에서 이 시리즈 우승 이후 12년만에 우승([[2009년]] [[10월]])과 함께 지긋지긋하게 타이거즈를 괴롭혀 왔던 아홉수를 풀어낸 것을 보면, 해태와 [[김대중]]의 운명은 묘하게 엇갈리는 듯하다.[* 2017년에는 김대중 계통인 민주당의 문재인이 대통령이었지만 사실 이것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어서 가능했다. 아마 탄핵이 없었다면 새누리당 정권에서(딱 박근혜 정권의 말미 중 말미 시기다.) 우승이 이뤄졌을 것이다.] 이는 2009년 9월 24일 군산 [[월명 야구장]]에서 열린 정규시즌 우승 확정 경기에서도 9회말 [[한명재]]도 언급했다.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]]이 1990년 통일 이후에 한동안 부진에 빠진 것과도 뭔가 흡사하다.[* 사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자신의 연고지에 속한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경우는 이명박(2011, 2012 삼성), 박근혜(2013, 2014 삼성) 둘 뿐이긴 하다.] [[국가부도의 날]] 영화에서 몇 번 자료화면으로 등장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